Chapter 17

바울은 “율법(모세)이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몽학선생이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령 내가 A라는 고명한 박사를 만나야 할 일이 있는데, 직접 안면이 없으므로 A박사를 잘 아는 B선생을 중간에 넣어서 선이 닿게 했다고 칩시다. 이 경우에 B선생이 애꾸눈이건 절름발이건 관계없습니다. 나는 다만 이 B선생을 길잡이로 해서 그의 뒤를 따라가 A박사와 접선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일단 A박사와 나 사이에 초대면 인사를 나누고 나면 나에게 B선생은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모세 율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A박사라면 율법은 B선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되어 주님과 영적인 교류를 시작하면 모세의 율법은 불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모세의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해서 아주 폐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온전한 ‘자유의 율법’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성도를 죽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이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령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물론 이방인으로 무할례자이지만 그녀는 성령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이 할례 받지 않는 자는 성령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하나님의 자손이 아니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교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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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서 설교했다면 그녀는 실망하여 곧 은혜를 등지고 말 것입니다. 즉 은혜는 살리려고 하는데 율법이 목을 비튼 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폐단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존속되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율법과 강령은 세례 요한 때까지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마11:13) 주님이 십자가에서 산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이 이를 입증해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마27:51)

그런데 당시에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12사도들과 120문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과 같은 성령을 받고서도 오랫동안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충실히 지킬 것을 강조하고, 만일 이 율례나 법도를 어기면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 경우 성령을 받으면 옛 율법은 필요 없고 새 자유의 율법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여전히 불필요한 옛것을 숭상하다가 결국은 은혜마저 쏟아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성령을 충만히 받고 어느 다락방에서 30명쯤 되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는데 그중에 어떤 사람이 심부름을 나갔다가 로마 병정에게 잡혔다고 합시다. 로마 병정은 그에게 예수쟁이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고 으르딱딱거립니다. 이때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율법에 충실히 살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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