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율법(모세)이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몽학선생이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령 내가 A라는 고명한 박사를 만나야 할 일이 있는데, 직접 안면이 없으므로 A박사를 잘 아는 B선생을 중간에 넣어서 선이 닿게 했다고 칩시다. 이 경우에 B선생이 애꾸눈이건 절름발이건 관계없습니다. 나는 다만 이 B선생을 길잡이로 해서 그의 뒤를 따라가 A박사와 접선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일단 A박사와 나 사이에 초대면 인사를 나누고 나면 나에게 B선생은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모세 율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A박사라면 율법은 B선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되어 주님과 영적인 교류를 시작하면 모세의 율법은 불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모세의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해서 아주 폐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온전한 ‘자유의 율법’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성도를 죽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이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령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물론 이방인으로 무할례자이지만 그녀는 성령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이 할례 받지 않는 자는 성령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하나님의 자손이 아니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교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