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머리말

영의 세계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우리의 지성(知性)만으로는 알기가 어렵다기보다는 알 수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의 지팡이에만 의지하여 세상을 살아가서는 절름발이 나그네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지성은 우리가 한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에 요긴한 잣대가 될 수 있으나, 그것은 결코 ‘필요하고도 충분한’ 구실은 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성 더하기 ‘알파’가 요구된다. 이 ‘알파’는 곧 성령을 가리킨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신령한 것을 알 수 없고, 신령한 것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더라도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숙원인 영원한 생명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신령한 신앙 체험에 의해, 살아 역사하시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신앙 체험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사고(思考), 즉 지성에만 의존한다면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

6 에덴의 메아리11권
Prologue

는다고 할 수도 없다.’는 칸트의 말(이율배반)을 상기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유무 여부도 단정할 수가 없다. 지성이 지닌 바 이와 같은 한계를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2천 년 전에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고전하신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의 생각(지성)으로는 목수 일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던 시골 청년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감람나무 시대도 주님 당시와 별로 다르지 않다. 빛과 어둠의 대결 구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예언된 감람나무가 나타나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드러내고 놀라운 권능을 행하여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고, 또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감람나무가 나타나면 하나님의 역사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데도 말이다.

감람나무를 알려면 다른 보혜사 성령,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요14:26)의 감동이 뒤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긴자 감람나무의 역사를 일으키신 지도 어느덧 40여 년이 지났으나, ‘부르심을 입어’ 그를 알아보고 따르는 양떼보다 그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못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다.(엡2:8) 신앙에서 인간은 이렇듯 수세에 놓여 있는 것이다. 감람나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지도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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