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진리로 무장하자

진리는 인간이 머리로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은혜의 다림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기꺼이 맞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좁은 소견으로 이 진리를 문전박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얼마나 많은 세칭 인류의 스승들이 손수 진리의 광맥을 캐려다가 번번이 실패했던가? 이것은 우리의 정신사(精神史)가 입증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 두뇌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진리와 비슷할 뿐, 결코 진리가 아니었다. 우리의 가장 큰 염원인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이비 진리에 어떻게 우리가 한 생애를 의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리의 현주소는 성경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여느 책들과 달리, 아무나 읽어서 쉽사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섣불리 지성에만 의존하여 답을 얻으려고 하면 점점 미궁에 빠져들기가 일쑤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6 에덴의 메아리12권
Prologue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개입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저자는 성령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영의 눈이 다소나마 뜨이지 않으면,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저항을 느끼게 마련이다. 우리는 성령을 충만히 받을수록 성경을 깊이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성경 해석은 성령을 받은 정도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상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칼뱅, 발트, 니버… 등 쟁쟁한 신학자들이 성경을 깊이 해명하려고 무던히 애써 왔지만, 아직도 왈가왈부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특히 성경 66권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와 계시록에서 그러하다. 심지어 문제의 소재도 파악하지 못한 채 적당히 넘어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것은 성경이 오늘날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초대교회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산이 200번이나 변했으나 기독교는 거두절미된 채, 의신득구(依信得救)로 요약되는(롬1:16) 바울 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 율법에 명시되어 2천 년 동안 대대로 지켜온 할례를 폐지시켜, 구약 시대를 명실 공히 마감하고 범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를 마련한 위대한 주의 종이요 또한 대신학자였으나, 주께서 그에게 맡긴 사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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