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교류가 가장 중요하며, 그 교류가 전부라는 식으로 기독교는 우리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따라서 신도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글자 그대로 인간 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보다 힘이 월등하여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류가 된다면 세상에는 아마 불미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하나님의 사정을 여러분에게 설명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것 자체를 한탄하여,(창6:6) 무엇인가를 복귀하시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을 여러분께 전하며 점차 하나님의 역사의 베일을 벗겨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잠깐 짚어 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걱정이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과 말씀하시는 가운데 걱정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조심하라는 경계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즉, “너희가 살고 있는 이 에덴동산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임의로 먹되, 동산 가운데 탐스럽게 생긴 이 나무의 과일만은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죽게 된다.” 해서 먹을까 봐 걱정하시는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창2:16-17)

이런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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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창1:31) 그런데 모든 창조가 다 끝난 상태에서 하나님은 만물의 영장이 되는 인간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문제입니다. 뭐냐? 경고의 대화가 시작된 겁니다. 먹는 날에는 죽는 과일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때 사람이 “왜 그 과일을 먹으면 죽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일방적으로 지시만 하십니다.

기독교는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지시뿐이고, 인간이 이유를 대어 “왜 그렇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경우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무조건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이것이 성경 66권의 공통된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늘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만 쭉 기록되어 왔으니까. 또 그걸 계속해 나오신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만사형통이다. 못하는 게 없으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뒤집어지는 이야기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경우가 좀 더 자세히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 이전까지, 즉 유다서까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일방적으로 쭉 읽다가 요한 계시록에 와서는 부딪치는 겁니다. 왜냐? 여태까지 읽던 그런 순조로운 이야기가 아닌, 엉뚱한 내용들이 쓰여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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