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았습니다. 그러나 차고 있던 손목시계만 박살이 났을 뿐 몸에는 다친 데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도와주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놀랍던 하나님의 역사가 차츰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형제들의 사랑이 식어 가더니, 서울에 7인 위원회가 조직되어 기혼자와 미혼자 교역자를 차별하고 그들의 행패가 심해지자, 나는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크게 활동하려는 생각에서 단을 내놓고, 여권 수속을 밟았습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의 모 학교에 미리 등록 절차를 마치고, 불원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길에서 우연히 휴직 중에 있는 지금의 주의 종(이영수 총회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도사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라, 다방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가 미국에 가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그쪽에 가서 초빙할 터이니 나를 뒤따라오라고 자랑스럽게 으스대면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전도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기는 할 일이 따로 있으니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실로 등골이 싸늘할 지경입니다.
그 후에 나는 주의 종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하루는 지금의 김해성 전도사님과 셋이 영천 카네기 다방에서 이야기 끝에, 주의 종께서 내가 세상에 물들어 술을 한두 번 마신 것을 충고하면서,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술만은 제발 입에 대지 말라고 당부하고, 박 장로님의 치리에 대해 그 장단점과 신앙촌에서 되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