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

상 구국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8.15해방을 맞았지만, 북한의 기독교인들에게는 광복의 기쁨을 맛볼 사이도 없이, 많은 목사님들은 보안서원에게 연행되어 시베리아의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습니다. 1947년 1월 30일에 나는 흰 눈이 한 자나 덮인 고향땅을 등지고 월남했습니다. 소련군과 내무서원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남한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서울역에 도착하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현동 마루턱에 있는 서울신학교(성결교 신학교)를 찾아갔습니다. 방학 중이라 학교는 조용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더니 3학년 학생이 맞아 주었습니다. 나는 신원을 밝히고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평양에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자기도 평양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고향에 갈 수 없어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나는 동향인을 만난 것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는 자기가 쓰던 방을 나에게 내주고, 돈 3,000원을 내 손에 쥐어 줬습니다. 그는 나에게 구세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서울역에 내렸을 때 15원밖에 없어 앞이 캄캄하던 나에게 주님은 이렇게 준비해 주셨던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뜨거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학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나는 고학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손에 잡아 보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학비 조달을 위해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1950년 4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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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

신학교를 마치고, 충남 청양 감리교회 전도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나는 충남, 충서 지방의 감리교 부흥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오늘날 에덴성회 교역자로 계신 하기호, 안운규 성회장님들은 나의 교역 시절의 홍성, 삽교 청년회원들입니다.

1953년 1월에 교역생활을 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군목으로서 최전방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그 끔찍한 전화의 참상을 겪은 후, 1956년 6월에 제대했습니다. 나는 그해 유형기 박사님(감리교 감독 목사)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수원지방 발안 어소감리교회에 시무하던 중에, 월남하신 부모님의 권유로 감리교회의 목회를 그만두고, 1957년 3월에 안동전도관 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내가 충남에 있을 때입니다. 박 장로님의 청주 집회에 갔다가 죄 타는 냄새, 송장 냄새, 향취, 그리고 이슬 같은 은혜의 창파 속에서 갖가지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그 밖의 여러 가지 난치병이 나았습니다. 박 장로님은 죄를 지적하시면서 안찰을 해주셨습니다. 안찰을 받고 시퍼렇게 멍이 들거나 얼굴에 울퉁불퉁 혹처럼 튀어나와 부끄러워서 바깥출입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감리교에 여러 해 시무했지만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산 체험은 나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교역생활에 열중하다 보니 가족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박 장로님의 교역자 대우는 엉망이었습니다. 나는 생각다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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