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구국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8.15해방을 맞았지만, 북한의 기독교인들에게는 광복의 기쁨을 맛볼 사이도 없이, 많은 목사님들은 보안서원에게 연행되어 시베리아의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습니다. 1947년 1월 30일에 나는 흰 눈이 한 자나 덮인 고향땅을 등지고 월남했습니다. 소련군과 내무서원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남한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서울역에 도착하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현동 마루턱에 있는 서울신학교(성결교 신학교)를 찾아갔습니다. 방학 중이라 학교는 조용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더니 3학년 학생이 맞아 주었습니다. 나는 신원을 밝히고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평양에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자기도 평양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고향에 갈 수 없어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나는 동향인을 만난 것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는 자기가 쓰던 방을 나에게 내주고, 돈 3,000원을 내 손에 쥐어 줬습니다. 그는 나에게 구세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서울역에 내렸을 때 15원밖에 없어 앞이 캄캄하던 나에게 주님은 이렇게 준비해 주셨던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뜨거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학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나는 고학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손에 잡아 보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학비 조달을 위해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1950년 4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