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

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곳의 비리와 불합리한 생활이 싫어서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고생만 하시다가 자식들이 저마다 살 만하게 되니 그만 떠나셨습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그토록 원하셨지만, 큰언니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이미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가정의 화목을 좌우명처럼 여기시던 분, 그분이 떠나시던 날은 삼복중에서도 가장 더운 중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신에서는 냄새 하나 나지 않았고, 아름답게 잘 피어서 편안히 가셨습니다.

시어머니(고 정향자 권사)께서 하루는 어떤 전도사를 따라서 에덴성회에 나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신혼 초라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속마음으로는 무척 못마땅했습니다.

‘교회에 나가시려면 일반 교회로 가시지, 하필이면 왜 또 전도관 흉내를 내는 그런 사이비 교회로 가신담? 아들이 마련해 놓은 집까지 팔아 바치고, 그것도 부족하여 어깨가 기울도록 보따리 장사를 하며 충성을 했건만, 지금 남은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도 또 그런 곳으로 가시다니!’ 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고,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학벌도 없고, 딴따라 출신인 그 사람이 어떻게 감람나무가 될 수 있습니까? 자신이 감람나무라고 자칭하는 곳은 모두가 이단이에요.”라고 시어머니를 극구 만류했습니다. 한 번 빠지면 돈과 자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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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남편까지 모두 버리고 따라가는 곳이 전도관의 생태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에덴성회로 나가시는 시어머니를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가정의 경제권을 내가 맡기로 했습니다. 시어머니께는 한 달 생활 경비만 빠듯하게 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관리했습니다. 크게 헌금할 여유를 드리지 않고, 가끔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가사도우미에게 시어머니의 동태를 물어보곤 했습니다.

시어머니도 전같이 터무니없는 헌금을 내시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용돈이 충분치 못하니 헌금할 돈이 없었겠지요.

교인들이 방문하면 내가 무척 싫어했기 때문에, 내가 있을 때에는 아무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이영수 총회장이 옥에 들어가고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자, 나는 시어머니께 강력히 권유했습니다.

“어머니, 그것 보세요. 한 번 당하시고도 또 그런 교회를 택하세요? 저하고 함께 집 근처의 교회로 가시지요.”

시어머니는 내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나 모르게 재판장에 다녀오시고, 면회를 가시고,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렇다고 나를 전도하려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내가 교회 욕을 하고 펄펄 뛰니, 더 죄를 짓는다고 말을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남편과 나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절약하여 돈을 모으고, 좀 더 큰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이들도 잘 자라고, 살아가는 데 불편이 없었습니다. 주말을 즐기고, 휴가를 즐기고, 여행을 가고, 구경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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