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

) 옆에 낡은 20여 평의 초가집을 사서, 벽을 헐어 내고 가마니를 깔고 제단을 마련했습니다. 첫 예배를 드리던 날,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479장) 찬송을 눈물로 목이 터져라고 부를 때의 그 감격, 그 기쁨은 마치 하늘에라도 오를 듯했습니다. 청주전도관이 개관 날짜를 정하고 박 장로님의 허락을 받고자 고등학생인 내가 서울 원효로에 있는 장로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그때는 이만제단을 짓기 전이어서, 원효로 공장 2층에서 예배를 보았는데, 청주에 와 주실 것을 말씀드렸더니, 장로님의 말씀이 “남산집회, 한강집회, 운동장집회 등 집회 때마다 수만 명씩 모여 부흥회를 하던 박 장로가 이제 다 찌그러진 초가집에서 집회를 하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하나님께도 덕이 되지 않으니, 다른 곳을 마련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청주에서는 오실 줄로 알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못 오신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해서 울며불며 청주의 딱한 사정을 말씀드리니, 난처한 얼굴로 계시다가 마지못해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1956년 예정된 날짜에 주의 종을 모시고 은혜의 창파 속에서 개관 집회를 마치자, 시내 각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강경한 반대와 만류를 뿌리치고 은혜 받은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제단이 차고 넘쳐서, 우암산 중턱에 터를 사서, 청주 시내 어느 교회보다 큰 제단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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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면 공사장으로 먼저 뛰어왔고, 직장인은 퇴근 후에, 어른으로부터 주일학교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일을 거들었습니다. 밤이면 횃불을 밝혀 놓고 산비탈을 깎아 개미 역사로 터를 닦았으나, 올라가는 길이 좁아서 자재를 차로 실어오지 못하여 교인들의 힘으로 500여 미터나 되는 산비탈 좁은 길을 시멘트 한 포대, 벽돌 한 장, 모래 한 알까지 등짐으로 져 올렸습니다. 손이 부르트고 어깨가 벗겨져도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함을 기뻐하며 감사의 찬송, 눈물의 기도, 성도들의 피와 땀으로 한 장 한 장의 벽돌이 쌓여서 마침내 청주 시내 어디서 보아도 우뚝 솟은, 자랑스럽고 거대한 제단을 이루어 놓고야 말았습니다. 그 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목숨을 다해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신념으로, 다니던 학교도 중단하고 제단 일에만 전념하다가, 전도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청주 지방 순회전도사로서 하루에도 수십 리씩 걸어서 전임 전도사조차 모시지 못하는 약한 전도관을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전도 사업을 하다가, 4.19혁명 이후 군에 입대하여 3년간 복무하고 제대하여, 윤영수 관장님 밑에서 청주전도관 전도사로 복직했습니다. 당시에 청주 제단은 윤 관장님이 10년 동안 대학 교수를 하면서 관장을 겸하고 있었으나, 어느 날 지방 순회차 청주에 오신 박 장로님께서 윤 관장에게 대학 교수와 관장 중 어느 것이든지 하나를 택하라고 하시므로, 윤 관장님은 사임을 했습니다. 후임에 박재흥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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