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

하여 추산동 피난민 촌락에 약 30여 평의 교회를 세워 남산교회라고 부르고,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때는 1955년, 서울 환도와 함께 상경하여 한양공고에 다니던 때였습니다. 12월 겨울방학 때 집에 내려가 보니, 부모님과 형님 내외분들이 남산교회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예배를 보러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일요일인데, 부친께서는 예배 보러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감람나무가 나타났는데, 그분이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매월 첫 월요일에 마산에 오시는데, 무조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부친이 가자고 하는데 뿌리칠 수도 없고 해서 따라나섰습니다. 가보니 그곳은 자산동인데, 술도가(양주장)를 하던 집 2층을 세로 얻어서 임시로 예배를 보고 있었고, ‘전도관’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여하튼 들어가 보았습니다.

약 200여 명이 모여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어찌나 손뼉을 열심히 치면서 부르는지, 뒤에서 보니 궁둥이들이 들썩들썩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우습기도 하고 민망스러워서, 맨 뒤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키가 훤칠하게 크신 분이 단상에 서시더니,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휴우’ 하면서 기운을 부는데, 모두들 열심히 기도들을 하더군요. 나는 도리어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았습니다. 그 후 무려 30여 분 동안 열렬히 찬송을 부르더군요.

그러더니 첫마디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것이 아니다. 못 하시는 일이 있다.” 하시면서 설교하셨는데, 모두가 처음 들어보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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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

이었습니다. 그의 언변은 그 어느 목사님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외침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니 어느 장로님 집에서 안찰을 한다면서 나보고 안찰을 받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따라갔습니다.

줄들을 서서 차례로 안찰을 받는데, 받는 사람마다 “아이쿠!” 소리를 연발하고, 네 사람이나 팔다리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하도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이미 방에 들어섰고, 뒤는 줄을 선 사람으로 막혀 버렸으니, 할 수 없이 ‘나 죽이시오.’ 하는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뱃가죽을 인두로 지지는 것 같은데,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하시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고집, 이 혈기, 이거 다 빠져야 돼.”

그 후 세월이 흘렀습니다. 서울에 와 보니 이만 제단 자리에 천막을 쳐놓고 예배를 보더군요. 나는 가뭄에 콩 나듯 가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1957년 4월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느덧 한양공고를 졸업하고, 한양공대 2학년의 1학기 등록금을 납부한 직후였습니다. 이만 제단이 거의 완공되고, 종각에 발판을 쳐놓고,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던 때였습니다. 제2의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 겸 부흥집회가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부친께서 상경하셔서 내 자취방에 머무시면서 집회에 참석하시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하였습니다.

집회 마지막 새벽이었습니다. 2층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눈을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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