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

니 이미 장로님은 단상에서 찬송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바로 새벽에 이변이 생겼습니다. 태풍 같은 큰바람이 나의 온몸을 감싸면서 나를 무릎 꿇게 만들고, 송곳 같은 바람이 귓속을 파고드는데, 몸서리쳐지는 그런 감각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쏴’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그 모든 바람이 사라지더군요. 동시에 귓속을 파고드는 장로님의 음성에 왠지 눈물을 펑펑 쏟았는데,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장로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후’ 하고 기운을 부는데, 웬 안개가 입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온 제단을 감싸 버리더군요. 여하튼 그 아침은 나의 인생관을 바꾸어 놓은 새벽이었습니다. 차돌보다 더 굳었던 마음이 녹아졌고, 세상의 모든 욕망을 내동댕이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학교도 친구도 다 등지고, 이만 제단에서 침식하면서 장로님의 명령에 따라 특별전도대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중, 고 학생 청년들을 합쳐서 특전대(특별전도대)에 가입한 수가 무려 2, 3백 명에 달했습니다. 각 구역을 나누고 또 각 조를 편성하여, 기성 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을 상대하여 감람나무의 출현을 얼마나 열심히 전도했던지, 그때의 그 모든 신앙 동지들은 지금은 어느 곳에서 무슨 일들을 하고 있는지, 이 글을 본다면 가히 감개무량할 것입니다.

그 해 10월,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나는 충남 아산군 둔포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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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

관 초대 전도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이 21세였습니다. 이듬해 흙벽돌 만여 장을 찍어 40여 평의 전도관을 지어 개관예배를 보고는, 또 다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지금의 천호동전도관 개척에 나섰습니다.

당시에 사진관을 경영하던 하상봉 권사가 땅을 사고, 전도 자금을 도와주었습니다. 24인용 천막을 쳐놓고, 우리는 숯불에 부채질을 하면서 거리낌 없이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나 어느 곳에 있던지 늘 맘이 편하다.’ 지금도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그때의 그 신앙이 그리워집니다.

장로님이 1차 옥중에서 출옥하신 후, 오만 제단에서 부흥집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장로님께서 나에게 소사 특전대 대장을 맡으라고 하시기에 순종했습니다. 앞뒤로 마이크가 달린 특전대 전용차에 영사기, 14인조 밴드를 갖추어, 경기도에서 시작하여 모든 곳의 전도관을 순회(경상도와 전라남도는 제외)하면서, 낮에는 밴드대의 노방 전도와 저녁에는 영화 상영으로, 그 당시 신앙촌과 전도관 그리고 박태선 장로에 대한 좋지 못했던 이미지를 바꾸어, 바르게 전할 수 있는 좋은 순회공연이었습니다. 특히 전북 전주에서는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아가면서 시가행진을 하며 마이크 방송으로 전도하였으며, 저녁에 공설운동장에서는 운동장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할 정도로 대성황이었습니다.

현재 본 성회 운영위원장인 최병식 장로가 그 당시 속초전도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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