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를 위해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다.”(마16:25)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이 은혜 안에 들어왔으면 주님의 눈 밖에 나는 일은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언제나 살아 계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세상에서도 목숨을 내놓는 사람 앞에선 굴하게 마련입니다. 춘향이가 이 도령을 위해 죽음으로써 정조를 지키려고 할 때, 아무리 악랄한 변 사또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 가운데 주의 아내로서 이만큼 지조를 지킨다면 마귀가 얼씬도 못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부르면서도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서 주님을 사모하는 열도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종들까지도 궁핍할 때에는 주님에게 애절히 매달리다가도 형편이 나아지면 어느새 믿음이 식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환경의 아들’이라는 말까지도 생긴 모양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거지가 되었건 왕좌에 올랐건, 주를 그리워하는 일편단심에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우나 괴로우나, 한결같이 주님을 사모하고 그 뜻에 따르는 자라야 비로소 지조가 있는 믿음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뒤를 재고 좌우를 돌아보는 동안에 어느새 믿음의 알맹이는 도망가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너무 복잡하게 예수를 믿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