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다는 것이다. 즉, 성경은 인간이 머리를 짜내어 쓴 글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 여호와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저자는 인간이라기보다 성령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로 알려면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하며, 그 성령을 받은 정도에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성경 해석이 구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성령을 받지 못하고, 하나의 고전을 대하듯 머리로만 성경을 읽어 내려간다면, 성경은 신화나 전설 또는 기껏해야 ‘베다’나 불경과 같은 옛 수양 서적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영의 양식은 얻을 수 없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 즉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선하게 살려는 수도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내세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분명한 증거에 의해 충족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경전부터가 특이하다. 즉, 성경에는 인간의 지식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성령의 조화로, 이 성령은 누구나 받을 수 있으며, 배우고 못 배운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에 널리 그 이름이 알려진 학자들보다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할머니들이 성경을 더 잘 아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설교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0세기의 대신학자 칼 바트가 아무리 유식하

10 계시록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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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하루에 3,000명이나 주 앞으로 이끈 무식한 어부 베드로의 설교를 따르지 못하는 법이다.

이 책의 저자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배운 것도 없는 새파랗게 젊은 분이지만, 그 입술을 통해 여호와의 심오한 말씀이 터져 나오고, 그 손길을 통해 뭇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는 큰 은총이 베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은총은 기독교 역사상 초대 교회 당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며, 그 위력은 당시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즉, 당시에는 불의 성령이 내렸지만, 지금은 불, 생수, 이슬의 성령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행2:3, 호14:5-6, 슥14:8 참조) 하긴, 그래야 한다. 마귀도 상대적으로 전력을 증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류의 앞날에 대한 예언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계시록은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책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거기 기록된 여러 가지 내용들은 워낙 난해하여 지금까지 많은 신학자들이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무던히 애써 왔으나 번번이 허사였다. 그것을 풀 때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단12:9, 계2:17 참조) 그러니까 계시록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은 뚜껑을 덮어놓고 있은 셈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직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무릇 예언서치고 일목요연하게 논리적으로 기록한 것은 하나도 없다. 거기에는 애매모호한 표현과 심지어 일부러 문맥을 엇갈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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