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도의 보배로운 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벧전1:1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로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3:9-10)

성경은 여느 책과 다르다. 다른 책은 주로 읽는 사람의 지적(知的)인 수준과 인생 체험에 따라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지게 마련이지만, 성경은 성령을 받은 정도와 신앙 체험에 따라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신학 박사나 교수보다도 불학무식한 할머니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가령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요7:38)는 말씀을 가리켜 요한은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9)고 친절히 해설까지 해 놓았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해설에 의해 머리로만 그런가 보다, 또는 그럴 테지, 하고 이해하는 신학자와 실제로 성령을 받아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무식한(?) 할머니 사이에는, 이 구절을 이해하는 정도에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즉, 후자가 전자보다 한결 실감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은 빤한 일이다.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도 알 수 있다.

본문 말씀에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라는 대목은 이 계시록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깨달을 만한 귀를 가진 사람은 들으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신령한 말씀을 들려줘도

176 계시록강해
Chapter 13

끝내 마이동풍(馬耳東風) 격인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런 의미가 바닥에 깔려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이라고 하지 않고 ‘귀’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과 같이 세상이 개화되어, 사람들이 글을 해득하고, 인쇄 기술의 발달로 책이 보급되어 있는 시대라면 ‘귀’가 아니라 ‘눈’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렇지 못하여, 성경 말씀도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주로 제사장이 읽어서 들려주었기 때문에 듣는 ‘귀’라고 한 것이다.

무릇 오묘한 진리는 대체로 세상의 통념(通念)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지만, 특히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 그러하다. 주께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로마에 억눌려 있는 유대 나라를 해방시켜 주실 줄 알고 또 기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인식 부족이었다. 주께서 해방시키려는 것은, 마귀에게 매어 있는 모든 인간의 영이지, 지상의 한 국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당시의 뭇 사람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갔다. 저들의 눈에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패배로 보였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다.

십자가는 최고의 진리를 상징하며, 죽음이 아니라 삶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기에 주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십자가를 짊어지라.”(마16:24)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바로 죽음을 이기는 길에 동참하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 생명길을 위해서는 죽음도 사양치 않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태도이다. 이 경우의 죽음은 벌써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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