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게 주신 유일한 글이며, 이 글에 의해서만 인생의 모든 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거기 죽음을 이기는 길도 열려 있다. 이것은 하나의 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여러 가지 신앙 체험 - 영적인 변화, 즉 보는 눈과 듣는 귀와 생각과 말과 행실이 달라지고, 영계와의 교류를 비롯한 모든 초인간적인 신비의 체험 - 이 그 타당성을 밑받침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결코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영적인 인연을 맺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하나님과 자기가 남이 아니라는 자의식을 갖는 동시에, 그 크신 손길을 피부로 느끼고 또한 의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을 십자가에서 살리신 그 손길이 자기를 결코 버리지 않고 죽음에서 건진다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이 체험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 기독교이며, 이것이 어떤 개인의 사상과 성경의 가르침의 다른 점이다. 또 성경의 성경다운 권위가 여기서 비롯된다. 이 성경에서 우주와 역사를 배우고 여호와의 큰 뜻을 헤아려, 그 은총 가운데 영원한 생명줄을 분명히 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대도를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지닌 또 하나의 권위는 거기 등장하는 수많은 선지자의 예언들이 그대로 적중된 데 있다. 우리는 예언서라면 요새 신문 지상에 꽤 떠드는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이나 ‘정감록’ 같은 것도 연상하게 되지만, 이것은 물론 성령의 지시에 따라 기록한 성

8 계시록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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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는 무관한 일종의 위서이다. 즉, 그 주관하는 본체, 다시 말해서 저자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방의 능력이 뛰어난 마귀의 계시에 의해 쓰인 것으로 그 예언의 적중률이 부실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의 경우는 그 예언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구약 시대의 앗수르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이나, 고레스의 바벨론 제패가 그러하며, 또 신약 시대에 와서 무엇보다도 주님에 대한 여러 가지 예언들이 그대로 들어맞아, 크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일에서, 작게는 그 속옷을 사람들이 제비뽑아 나눠 갖는 것에 이르기까지, 선지자의 입을 통해 몇 백 년 전에 기록한 수십 가지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스라엘의 독립이며, 우리나라에서 4대강국의 이해가 뒤얽혀 각축을 벌이는 것도 성경 말씀 그대로이다. 뿐만 아니라 근자에 식자들 - 예수를 믿고 안 믿고 간에 - 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이른바 말세의 현상을 두고 보더라도 그렇다. 가령 핵무기의 위협이나 각종 공해, 인륜의 타락, 하늘의 이상, 교통의 발달, 배도자, 즉 적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의 속출이 그렇고, 무엇보다도 큰 권능을 들고 이 땅에 나타난 ‘이긴자’의 출현이 그렇다. 이 모든 현상을 놓고 보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성경이 여느 책과는 다르

계시록강해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