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의 잘못이지 결코 하나님의 탓은 아니었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유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해 준 이상, 행동 하나하나에 간섭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릇된 인생관을 고쳐야 합니다. 요컨대 인간 본위의 생각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 1 르네상스는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돌아갔으나, 제 2 르네상스는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전자는 후자에게 흡수되어야 합니다. 즉 인간본위의 모든 사고방식과 언동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세기의 신본주의와는 그 차원을 달리하며, 또 달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휴머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제 1 르네상스 이후의 그것과는 판이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은총 아래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재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 2 르네상스의 첫째 과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억압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켜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를 제일 얽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뭐니 뭐니 해도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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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해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굴복하게 마련입니다.

하긴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여러 가지 제약을 받습니다. 주일날 마음대로 놀러가지도 못하고, 연보도 내야하고, 그밖에 그래서는 안 된다, 이래야 한다, 하고 간섭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작은 자유를 억제하려는 것이지, 결코 억압이 아닙니다. 이 밖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율법’이라는 이름의 하나님의 가르침 자체에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가르침이 납득이 가지 않을뿐더러, 때로는 ‘엉터리’라고 속단하게 될 정도로 유치하게 보입니다. 즉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는 사례가 허다하며, 우상숭배와 같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 격분하며, 원수는 철저히 갚아야 하고,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큰 책벌을 내리기가 일쑤입니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휴머니즘(인본주의)의 견지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동시에 두렵기 짝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하시다고만 여기다가는 나중에 실망하게 됩니다. ‘무슨 하나님이 이래!’ 하고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도적 같은 아버지도 자식이 미워서 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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