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니다.

영의 일을 육적으로만 생각하여, 구세주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려니 하고 기대에 부푼 제자들이 당신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실망할 때, 주께서는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로 오시지 않을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16:7) 옳은 말씀입니다마는, 이 말씀이 당시의 제자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겠습니까? 오히려 원망스럽게 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이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왕이 되면 한 자리 하려고 잔뜩 노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대체 주님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했을까요? 우주의 창조에 동참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제물이 되다니, 이런 못난 짓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마냥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한번 뛰어내려와 보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에게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무능한가?” 영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는 어느 의미에서 당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귀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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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에 못 박히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계셨다면 그런 매정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제물로 받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하는 주님의 호소를 묵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알게 되면 이것은 곧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바친 제물은 비둘기와 양과 송아지였는데, 죄과의 경중에 따라 드리는 제물도 다르게 마련이었습니다.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었을 때에는 구하기 쉬운 비둘기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제사장을 통하여 깨끗하지 못한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로는 지은 죄를 도저히 눈과 같이 씻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런 자범죄뿐만 아니라 원죄와 유전죄까지도 걸머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까지도 완전히 도말 받으려면 흠과 티가 없는 제사장과 제물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물을 창조할 때부터 동참하신 주님이 직접 당신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한 번 드린 제사로 속죄의 길을 열고, 돌에 새긴 모세 율법을 폐지하는 동시에, 마음과 생각에 새기는 자유의 율법을 선포하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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