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그리고 주님이 생축이 되어 드린 신령한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곧 생수의 성령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성령은 사람을 통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고넬료에게 성령을 내리실 때에도 베드로의 손을 거치게 했던 것입니다.(행10:1 참조)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크게 일으키려면, 아무래도 그런 중개자를 세워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긴자도 주께서 세운 이런 성령의 중개자입니다.

그를 통해 주의 피는 이슬같이 내리고, 불과 생수의 강한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그의 입을 통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마음의 평안을 주게 마련입니다.(요14:26) 이 경우에 그는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말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요16:13) 그러니까 모든 것이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혜의 연결을 받아 하나님의 영으로 움직이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롬8: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6) 예배에 대하여

사람들이 살아가는 태도는 천층만층이지만, 이것을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공경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전자의 생활 태도를 인본주의적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신본주의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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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외면적인 구분이고, 실제로는 거의 다 전자와 같은 생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오늘날 하나님을 공경하노라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인간본위의 생활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하기야 인간이 육을 갖고 있는 이상, 먹고 살아야 하므로 세상과 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공기만 마시고 살 수 있습니까? 내가 말하는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란 세상과 짝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컨대 빨래를 하더라도 영의 때를 씻는 심정으로 찬송가를 입 속으로 나직이 부르면서 빠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때를 씻는 데만 온 정신을 빼앗기는 사람의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되 적당히 하고, 생활은 생활대로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신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볼일 때문에 예배에 빠지는 사람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자기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사고방식이나 신앙 자세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크고 작고 간에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영위되어야 하며, 일거일동이 하나님과 어떤 형태로나 선이 닿아 있어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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