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야 하리라.”(요3:30) 이것은 참으로 요한의 위치에서 의젓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요한은 이때까지만 해도 ‘길 예비자’로서의 자기 위치를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차츰 두 분의 관계는 미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기 위해 이적과 기사를 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데는 제일 속한 방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마치 광대 구경이라도 가는 심정으로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예수라는 이상한 사람을 보러 모여들었습니다.
(2) 주님과 시험
세상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유럽과 북미 여러 나라들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자 습관이 되어 주일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모입니다. 설교도 들을 겸, 사람도 만날 겸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거나 참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살아가는 방편의 일부로 교회 문을 드나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에는 타성이 생기고 때가 끼게 마련입니다. 교회 건물이 화려하고 예배 의식도 그럴 듯하지만, 영은 기갈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함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그 폐풍은 우리라고 해서 물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은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