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

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서 담판을 하려고 했으나, 베드로는 만나 주지도 않았습니다.(갈1:19) 아직 바울의 기반이 온전히 닦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바울을 따르는 무리는 눈사람을 굴리듯이 늘어났으며, 그 중에는 베드로를 따르던 자들도 상당히 많이 끼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안찰을 하여 성령을 부어주고, 병자를 고치는 등, 권능도 베드로 못지않았을 뿐더러, 말씀이 새롭고 오묘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세력이 커지고 베드로의 추종자들이 바울에게 점점 더 많이 쏠려 이제 양쪽이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자, 베드로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불가불 어떤 용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협상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종으로 언제까지나 대립과 반목을 계속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무력부터 양측에서는 열띤 교리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즉 ‘할례 지지론’과 ‘할례 폐지론’이 팽팽히 맞서 결말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 담판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처음에 베드로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지 14년 후의 일입니다.(갈2:1) 그러나 이때 바울은 교리도 교리지만, 지지 세력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바울을 위시해서 양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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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7

대표들이 자리를 같이하는 역사적인 간부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양측은 갑론을박(甲論乙駁)하면서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드디어 베드로가 바울의 ‘할례 폐지론’을 인정함으로써, 교제의 악수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행15:7, 갈2:9)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역사도 세상일과 마찬가지로 힘의 밑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쪽이 진리라 하더라도, ‘너는 너, 나는 나’로 피차에 평행선(平行線)을 달릴뿐더러, 반목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국을 보십시오. 몇 십 년 전만 해도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하여 세계 어느 나라도 중국 사람이라면 우습게 대했으나, 근래에 와서 원자탄, 수소탄도 만들어 제법 실력을 기르니까 미국이 탁구 경기다, 만리장성 관광이다 하고 추파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대립될 때 처음에는 강자가 약자를 밟고, 상대방이 어느 정도 커지면 방해 공작을 벌이고, 다음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면 협상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종은 갈려도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없이 지속되게 마련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경우를 볼 때, 다 함께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역사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옛 것을 고집하고, 바울은 새 것을 들고 나왔다는 점입니다. 이때 결국 득세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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