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맞는 말입니다. 그들은 성경(구약)에 정통하여, 이런 질문쯤에 대답이 막힐 리가 만무합니다. 주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주님이 그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마22:45)

주님은 영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영의 세계를 잘 모르는 저들은 여기서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들도 역시 사두개인과 마찬가지로 창피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불학무식한 줄로 알았던 주님은 유식한 저들의 선생님이 되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모두가 성령의 조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은 물론이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보다도 먼저 계셨습니다. 아니 우주의 창업에 여호와와 함께 동참하신 주님이십니다.(창1:26) 다시 말해서 주님은 육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영적으로는 다윗의 증조할아버지보다도 더 어른이십니다. 그런 분이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지구의 한 모퉁이에 오실 때 다윗의 자손의 옷(육신)을 잠시 빌어 입었다가, 다시 하늘에 오르실 때 그 옷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우주를 지으신 주님을 상기해 보십시오. 해답이 스스로 나올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주님의 영적인 질문에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손을 들고 말았을까요? 이들은 율법주의자로 영의 문제를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의 세계는 율법으로 아무리 따져봐야 알 수 없습니다. 저들이 주님을 처형한 원인이 여기 있었던 것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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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다. 저들의 눈에는 주님의 놀라운 이적과 기사쯤은 모세의 전례도 있고 해서 이해가 갔는데, 말씀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부터가 비위에 맞지 않았습니다. “나를 믿으라.”, “나를 거쳐야 하나님에게 갈 수 있다.”, “내 피를 마셔라.” 등, 그밖에 말씀 하나하나가 다 귀에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런 깊은 말씀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주의 은혜 가운데 젖어들어야 합니다. 율법은 은혜에 도달하기 위한 다리의 역학을 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다리’를 ‘몽학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갈3:24) 일단 은혜에 접하게 되면 율법은 은혜 아래 속하게 됩니다.

성경은 크게 율법과 은혜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양자는 긴밀한 관련이 있으면서도 차원(次元)이 다릅니다. 율법을 거치지 않으면 은혜에 이르지 못하지만, 일단 은혜에 접하면 율법은 무용지물이 되고, 새로운 율법, 곧 자유의 율법 아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래라 저래라 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언동을 취하게 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여 하나님의 눈 밖에 난다면? ― 그러나 그를 구속할 율법(모세)은 없으므로 당장에 어떤 제재를 받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죄를 지으면 은혜가 떠나고 율법 아래 떨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저주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갈3:10) 이것은 은혜를 받았다가 놓쳐 버리고 다시 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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