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럴까요? 편안히 가려면 마귀가 잡고 있는 세상과 타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은 세상을 등진 사람,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지 못해 사는 사람에게 잘 내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하늘의 도를 전하신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교권을 쥐고 잘 사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주님을 오히려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은 오지 않으며, 왔다가도 “아이고, 골치야!” 하고 외면하기 쉽습니다. 세상에 매인 사람들의 머리에는 복음이 잘 들어가 박히게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기보다도 어려운”(마19:24) 법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천진스러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어설픈 지식이나 작은 능력을 내세우면 은혜가 가지 않습니다. 주께서 순진한 어린이를 좋아하신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것을 기뻐하십니다. 나도 세상과 영합하여 구수한 말로 교인을 모아 놓고 2부, 3부의 예배를 보게 하자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니며, 또 주님의 지시 내용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인기나 끌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그것으로 끝나고 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