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서, 매식하기가 간편치 못해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베다니 마을에 이르렀을 때 몹시 시장하여 무화과나무의 열매로 요기를 하시려고 두루 살펴보았으나, 아직 계절이 일러 열매가 맺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물론 나무의 탓이 아니며, 나무에게 잘못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주님은 하도 시장하여 은근히 화가 난 김에 앞으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했습니다.

이 저주는 주께서 무심코 던진 것이며, 무모하고 천진스럽기까지 한 언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는 저주는 나무가 나무 구실을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말씀이 그대로 응해졌기 때문입니다. 즉 이튿날 베드로가 보니 그 무화과나무는 뿌리까지 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주님은 하나님께서 종으로 들어 쓰시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아들이므로 그 말에 응분의 권위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위신도 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저주가 다만 저주에 그치고 아무 반응이 없다면 주님은 체통이 서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 자신의 권위에도 손상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설사 나무라 할지라도 저주를 면치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기독교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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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나무를 저주하여 그것이 응해지게 했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나무는 주님의 저주를 받고 말라죽었습니다.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나무에게 입이 있다면,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대뜸 항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항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주님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저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에는 인간의 이치로 따질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초인간적(超人間的) 인 절대성(絶對性)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는 바울의 말도 이런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누구를 긍휼히 여기시고, 누구를 강퍅케 하신다는 것입니까? 바울은 이런 항의를 예상했던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리가 없느냐?”(롬9:21)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 최대의 선이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악입니다. 성령을 훼방한 죄가 사함을 받을 길이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기독교가 세상의 도덕과 크게 다른 점입니다.

빌립이 주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했을 때,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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