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은 거의 다 베드로의 추종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슬하에 있을 때에는 그 가르침이 제일인 줄 알았는데 바울의 설교를 듣고 보니 귀가 번쩍 트였던 것입니다. 그 설교는 한결 차원이 높고 깊이가 있어, 이들은 그제야 바울을 따르기를 잘했다고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감람나무 역사도 이와 비슷합니다. 성경에 명시한 대로, 두 감람나무는 똑같이 하나님이 세운,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서 있는 자”(슥4:14)로서 ‘금 기름’이 흘러내려(슥4:12) 따르는 성도들에게 세 증거(불, 이슬, 생수)의 성령의 은총을 부어 주는 종이지만, 양자 사이에 이른바 ‘교제의 악수’가 이루어질 가망은 거의 없이 심한 반목을 일삼는 것은 각각 주장과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전자는 성경에서 떠나 무슨 조건을 내걸고 감람나무는 하나라고 우기는 반면에 후자는 성경 말씀 그대로 감람나무는 둘이라고 주장하며, 전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씨를 뿌리는 것이고 후자의 사명은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자는 놀라운 능력을 행하여 그 슬하에 많은 사람들을 인도해 들이면 일단 할 일을 다 하게 되며, 그 뒤를 이어 후자는 말씀으로 감람나무의 체계를 확고히 세우고(계2:17) ‘이한 낫’을 휘둘러 알곡을 거두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계14:16)

성경에 감람나무의 또 다른 이름인 이긴자를 단수로 기록한 것은 세대를 이어 한 사람씩 역사하기 때문이며, 감람나무 자체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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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9

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슥4:11, 계11:4) 이것을 끝내 하나라고 고집한다면 결국 고집으로 끝날 뿐, 자고로 비진리는 조만 간에 꺾이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앞선 감람나무에게 눈엣가시처럼 느껴지는 것은 성경에 뚜렷이 명시된 ‘두 감람나무’라는 말씀이고, 이 말씀대로 등장한 두 번째 주인공이 이영수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밟아 없애려고 해도 되지 않으니, 돌파구를 모색한 끝에 드디어 주의 피를 짓밟고 성경까지도 불신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쯤 되면 베드로와 바울의 갈등은 새 발의 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렇게 180도로 돌변하다니, 마귀의 두려움을 다시금 실감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등지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개탄할 노릇입니까? 그는 또 그렇다 치고, 그 밑에서 은혜 받겠다고 모인 자들이 여기에 덩달아 맞장구를 치고 있으니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이 배워서 알고 있다는 소위 감람나무 체계라는 것이 얼마나 엉성하고 빈약한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역사가 뒷수습을 하지 않았던들 감람나무는 성경 말씀과는 달리 영원히 악조건, 호조건에 의해 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앞선 역사에 몸담은 사람들은 어디로 갈 겁니까?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역사에 들어와야만 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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