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가소롭겠습니까? 이런 자는 주께서 탕감해 준 빚을 도로 받아 가는 것입니다. 즉 그가 아무리 잘 믿고, 십일조를 잘 내고, 새벽 기도를 열심히 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눈 밖에 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지 않고, 자기 죄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으려고 한다면 이런 얌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죄의 빚을 탕감 받았으니, 나에 대해 형제가 저지른 어떤 죄의 빚인들 탕감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느냐는 마음이 참으로 우러나, 그 죄를 용서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주의 종으로서 큰 사명을 맡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주기도문에 저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남에게 욕먹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탕감 받은 원죄와 유전죄, 그리고 자범죄에 비하면 남이 나에게 저지른 죄는 새 발의 피라는 생각이 앞서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중심으로 솟아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 자기를 부당하게 해치려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 상례요,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 윤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