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당하기보다 강자가 약자에게 당하는 것은 몇 배 괴로운 일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처형한 것이 십자가의 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를 위해 하나님께 축복의 기도를 올렸습니다.(눅23:34) 실로 주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최대의 사랑입니다.
말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일을 다 하고 나서 주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해친 사람을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는 정도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속죄의 제물로 삼는 것은 결코 간단히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장애가 개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빈틈없는 배려를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인용하여 당시에 내노라고 세도를 부리는 자들을 탓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사6:9-10, 마13:14-15) 왜 하나님은 이들로 하여금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만일 교권을 잡은 이들의 눈과 귀가 열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