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게 당하기보다 강자가 약자에게 당하는 것은 몇 배 괴로운 일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처형한 것이 십자가의 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를 위해 하나님께 축복의 기도를 올렸습니다.(눅23:34) 실로 주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최대의 사랑입니다.

말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일을 다 하고 나서 주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해친 사람을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는 정도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속죄의 제물로 삼는 것은 결코 간단히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장애가 개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빈틈없는 배려를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인용하여 당시에 내노라고 세도를 부리는 자들을 탓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사6:9-10, 마13:14-15) 왜 하나님은 이들로 하여금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만일 교권을 잡은 이들의 눈과 귀가 열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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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며, 하나님의 원대한 뜻이 좌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처형되기 얼마 전에 수제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친 것도 깊이 상고해 보면 하나님의 각본에서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구동성으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면 사태가 뒤바뀌어 당시의 권력층이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을 주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물론 주님을 아주 버린 것이 아니며, 주께서 승천하신 후 불과 같은 성령을 받아 목숨을 내걸고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기독교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주님은 땅에 계실 때 이것을 내다보시고 이들에게 축복 기도를 하였으며,(요17:1-26) 이들의 공로를 인정하여 왕의 반열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고,(마19:28) 천국의 기초석으로 삼을 것을 사도 요한에게 계시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계21:14)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을 본 성도는 500여 명이나 되지만,(고전15:6)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12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불과 같은 성령이 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이런 소중한 성령을 부어 주시지 않습니다. 이 성령을 받고도 고맙게 여길 뿐, 겁에 질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가치는 매장되어, 차라리 주지 않은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정한 시험을 거쳐서 틀림없다고 인정되었을 때 성령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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